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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의 대가, 수호전을 역사로 읽다 표지.jpg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차혜원 옮김|367면|발행일 2006년 3월 20일|값 14,500원|ISBN 9788991510227

 

《수호전》을 역사로 읽다?

 

 역사를 대중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로 탈바꿈시키는 것은 이제 그리 참신한 시도는 아니다. 지금의 관건은 어떻게 하면 더 도발적으로, 더 극적으로, 더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꼬아놓느냐, 바로 그것일 것이다. 역사소설이나 사극 등의 이야기 전개는 크로스오버 단계를 넘어 이제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독자를, 관객을 헷갈리게 만들 정도로 치밀해졌다. 어쩌면 이제 ‘진중한’ 역사는 정말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나 영화감독은 역사를 자유자재로 주물럭거리며 그것을 끊임없이 재조립, 재생산해서 세상에 던져놓는다. 이제 그 스토리의 역사적 고증이니 개연성이니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렇게  재생산된 이야기는 그것 나름대로 현대인에게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 만들기’는 유독 우리 시대 인류만이 해낼 수 있는 특기는 아니었다.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가 생긴 이래, 혹은 굳이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에도 입으로, 노래로, 춤으로 이야기는 만들어지고 또 만들어져왔다. 《수호전》도 아마 그런 과정을 거쳐, 그러니까 화자의 말재주에 따라 이야기가 이렇게 보태지고, 저렇게 빼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을 것이다. 수많은 이본異本이 그것을 증명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대가 지날수록 《수호전》의 이야기는 원래의 모습에서 점점 변형된 나머지, 허구는 머리가 되고 사실은 꼬리로 변해 마치 자기 혼자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유기물, 그것도 머리가 여러 개인 유기물이 되어버렸다. 이러할진대 제 아무리 날고 긴다는 역사학자가 꼬리로 변해버린 그 ‘사실’을 찾아나선다고 용을 쓴들 그 성과가 얼마나 있을까 걱정부터 앞설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상상력 뛰어난 작가나 화자의 의도에 따라 드라마틱하게 재구성된 이야기, 대중이 원하는 이야기로 속절없이 바뀌어버린 ‘변절한’ 역사 속에서 원래의 순수한 모습을 찾는 일은, 그들의 상상력을 몇 갑절 뛰어넘는 ‘초상상력’이 필요한 작업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대의 흐름, 대중의 바람을 거스르는 ‘역사로의 귀환’이 과연 필요하기는 한 걸까?


소설과 역사의 만남, 그 시너지 효과

 

 중국 송나라 연구의 대가大家이자, 어린 시절부터 《수호전》의 애독자였던 저자 미야자키는 문헌 자료를 정밀하게 분석하여 《수호전》이 역사적 사실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가라는 난제에 도전했다. 그 결과 《수호전》의 배경인 송대의 양산박은 소설 내용에서처럼 도적과 비밀결사의 은신처였고, 수백 년간 계속된 황화의 물길 변화로 그 양산박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송강, 휘중, 채경, 방랍 등 《수호전》 등장인물들의 행적이 예상보다 역사적 사실에 근접해 있음을 확인했다. 그런가 하면 흥미 위주로 꾸며낸 것으로 알려져온 인신공양이나 식인 풍습 등의 잔혹한 내용 역시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공식 기록으로는 남기 어려운, 외면하고 싶은 역사의 어두운 기억이 소설 속에서는 외면당하지 않은 것이다. 미야자키는 이런 식으로 30년 동안 송대사를 연구하며 거둔 연구 성과를 통해 《수호전》에 나타난 허구와 사실의 간격을 하나하나 메워나갔다. 그리고 그 성과를 이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낸 것이다.

 과연 이러한 작업이 역사학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라는 앞서의 문제제기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쯤해서 저자의 변을 한번 들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나는 원래 사학이 전공인 터라 문학이나 사상 분야에는 손을 대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문학과 사상에 관한 문제도 다루는 방법에 따라서 그대로 역사학의 대상이 된다. 더 대담하게 말하자면 역사학적인 입장에서 다루는 쪽이 오히려 적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시대 소설인 《수호전》이 바로 그런 경우일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추어의 이런 발언이 《수호전》에 어떤 손상을 끼칠 리는 없다고 본다.” -맺음말 중에서


 즉 자신의 작업은 문학이라는 남의 밭을 침범한 게 아니라 원래 개간되어야 할 역사학의 영토에 비로소 발을 들여놓은 것으로 봐야 한다는 의미다. 더 나아가 역사와 소설 분야의 이와 같은 상호 보완적인 작업이 가능할 때 역사는 역사대로, 소설은 또 소설대로 자기 분야의 영역을 한층 넓혀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과 허구는 서로 상종하지 못할 물과 불의 관계가 아니라 도리어 물과 기름의 관계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이 책이 출간된 후에 미야자키는 〈수호전과 강남민가〉라는 논문에서 《수호전》에 묘사된 가옥 구조가 실제로 강남 지방의 것임을 밝혀냈는데, 이는 《수호전》의 무대는 황하 유역과 산동성이지만 이야기는 양자강 중하류 지역에서 발전되었다는 것을 입증한 것으로,  중국 문학자들이 《수호전》에 나타난 방언 분석을 통해 《수호전》이 항주를 중심으로 한 남방의 산물이라고 밝혀낸 연구 결과와 정확히 일치한 것이다. 이를 두고 한 중국 문학연구자는 “옆집 아저씨가 남의 밭에 와서 수확한 것이 수십 년간 《수호전》 연구에서 거둔 최대의 열매가 되고 말았다”고 자조했다고 한다. 결국 정리하자면 이제 역사학이라는 텃밭의 경계는 이미 허물어질 때로 허물어졌는데, 그것은 역사학의 모호함 혹은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더 넓은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연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열린 역사학’, ‘넘어서는 역사학’인 것이다.


허구와 진실 사이의 그 무엇 

 

《수호전》에서 사실과 허구는 이처럼 서로를 보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경우도 많다. 이를테면 역사에서 도적 송강은 보잘것없이 패배했고, 때에 맞춰 단비를 내리게 하는 ‘급시우及時雨’ 송강도 없다. 극한 상황에서 일어난 민중봉기 와중에 소설에서처럼 의리를 지키는 인물을 찾기란 쉽지 않다. 적과 동지, 선과 악을 구분하기 힘든 상황에서 집단행동은 대개 내부 갈등과 배신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사실’ 그 자체는 민중 영웅들의 초라한 실체를 드러내고 모처럼의 장쾌한 꿈의 세계를 땅바닥으로 끌어내린다.

 역사학자는 극적 재미를 위해 진실을 약간 숨겨주는 센스도 없다는 말인가. 왜 이렇게 깐깐하게 사실만을 추구하려는 걸까. 사실, 그건 역사학에 대한 오해일 수 있다. 허구와 진실을 가려내는 것, 그것은 미야자키와 같은 역사학자들이 가져야 할 1차적인 의무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허구와 진실을 가려내는 작업 그 자체가 아니라, 허구와 진실 사이에 놓여 있는 ‘그 무엇’을 발견해내는 것이다. 바로 ‘그 무엇’이 오늘날 세계 역사학계의 화두로 대두된 신문화사, 심성사의 관심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다. 미야자키는 《수호전》에 드러난 허구와 사실 사이의 간극을 통해서 당시 민중의 꿈과 좌절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의 꿈과 좌절은 무엇이었을까.

《수호전》의 원형이 탄생한 ·12세기 초반은 전쟁과 내란으로 사회 전체가 혼란에 빠진 혼돈기였다. 문자 그대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참상이 벌어진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힘을 합쳐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호걸들의 모험담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가혹한 세계를 견뎌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세상을 읽는 지도였고 때로는 위안과 구원이 되었을 것이다. 이야기는 언변 좋은 전문 이야기꾼의 입을 빌려 점점 더 재미있게 변형되어갔다. 현실의 참혹한 전투와 희생은 호걸들의 무용담으로, 민중의 분노는 교활한 관료와 지식인들에 대한 통쾌한 복수극으로 전환되었다. 다시 말해 《수호전》은 사실 그대로가 아니라 ‘그랬으면 좋겠다’는 민중의 갈망이 개입하면서 허구화의 과정을 겪었다. 그런 까닭에 적절한 분석을 거친다면 사실이라는 뼈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의 공감 속에 형성된 허구라는 풍성한 육질 역시 그 시대의 사유 체계와 세계관을 증언하는 중요한 재료가 될 수 있다. 오늘날 역사학이 바로 허구와 사실 사이의 이 ‘육질’에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야자키는 수호전에서 무엇을 읽어냈는가 

 

 미야자키는 《수호전》에 등장하는 특색 있는 인물을 뽑아서 소설적 허구의 밑바닥에 숨겨진 역사적 진실을 찾아내고자 했다. 따라서 이 책은 《수호전》의 줄거리를 좇아가는 게 아니라 송강, 방랍, 동관 등 주요 인물을 열전 형식으로 재서술하고 있다. 악행과 선행을 동시에 일삼는 《수호전》 호걸들의 인생 유전은 이들이 처했던 불안한 사회적 위상을 잘 말해준다. 실제 역사에서도 관료 조직의 말단 구성원들은 《수호전》의 주인공들처럼 삶의 기반을 허무하게 잃고 낙오되어갔다.

 관료제의 최상부에 위치한 인물들의 자취에서 시대의 영향과 한계는 더 뚜렷이 드러난다. 재상 채경과 환관 동관의 악행은 단순히 개인적인 비리만이 아니라 황제의 측근이 정책 의결권과 관료 인사권을 독점하면서 나타난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했다. 이는 황제 중심 정치 체제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고, 유사한 제도를 택한 체제에서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수호전》에 나타난 사회적 위기는 송대 말엽의 이러한 정치 체제의 동요와 직결되어 있다. 미야자키는 특정 제도를 고립적으로 파악하기보다 사회 발전의 거시적 흐름 속에서 제도를 이해하고 이를 단서로 문화 전반의 성격을 규정짓는데, 이 책에서 설명된 여러 제도들은 그가 주창한 황제 독재 체제라는 송대의 독특한 지배 구조를 이루는 주요 구성 요소들이기도 하다. 정교한 관료제와 문화적 원숙함으로 상징되는 중국의 르네상스기, 그런데 그것과는 극적인 대조를 이루는 일반 사회의 지체 현상. 바로 미야자키가 포착해낸 현상이자,《수호전》에서 읽어낼 수 있는 시대상이다. 


우리에게 수호전은 무엇인가

 

 수호전이 문학적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 최근 역사학의 흐름은 고대소설 속에 뒤섞여 있는 허구와 진실 사이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것, 그것들 말고 우리가 남의 나라 영웅 호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고맙게도 저자 미야자키는 이에 대해 아주 적절한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자신도 중국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는 전통중국과의 절연을 강조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장을 우회적으로 풍자하면서 “어떻게 해서 콩 심은 데서 팥이 나왔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수호전》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의 중국이 전통 시대 중국의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변화 과정을 파악해야만 현대 중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일본에서 이 책이 출간되고 3년이 지난 1975년에 당시 중국의 최고 정치 지도자 모택동은 투항파 송강을 비판하면서 재집권한 등소평과 그의 후견인 주은래에게 정치 공격을 가했다. 다음 해 사인방四人幇에 의해 투항주의를 비판하는 여론이 전국적으로 조작, 확산되었는데,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등소평의 재실각을 노린 것이었다. 모택동이 죽고 사인방이 체포된 후에는 《수호전》 비판에 대한 재비판이 제기되었다. 중국에서 《수호전》을 둘러싸고 정치 공방이 벌어진 까닭은 이 소설이 문학과 역사의 차원을 넘어서 정치 지도자와 민중들 사이에 가장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군중 심리를 자극할 수 있는 표상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수호전》의 인간관, 권력관은 과거를 넘어 현재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현대 중국을 이해하는 데 《수호전》은 필수적인 참고 도서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이 책에는 일본 에도 시대의 대화가 호쿠사이가 그린 역동적인 그림들이 다수 실려 있어 책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특히 원문에는 없는 도판을 다수 수록하고 부록을 추가하는 등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더군다나 저자 미야자키는 대학자답게 “요즘 사람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심오하고 난해한 문장으로 말하는 걸 가지고 ‘학문’ 한다고들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학문이 없는 사람이라고 보아도 좋다”라는 철학을 지니고 있어 독자들의 글읽기 부담을 한껏 덜어주고 있다. 


지은이 _미야자키 이치사다 宮崎市定(1901-1995)

 

 20세기를 대표하는 동양사학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1901년, 나가노현長野縣 飯山市에서 출생, 1925년, 교토대학 문학부 동양사학과를 졸업했다. 동 대학 동양사학과 교수와 명예교수를 역임하면서 중국사의 거의 전 분야와 아시아사에 걸쳐 방대한 역사연구를 남겼다. 특히 중국 송대(960~1279)를 문화·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주요 변혁기로 설정해야 한다는 그의 학설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역사학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60년에서 1965년간 파리, 하버드, 함부르크, 보쿰의 각 대학의 객원교수로 초빙되었고 1989년에는 문화공로자로 표창되었다. 저서로는 《九品官人法の硏究》, 《アジア史硏究》, 《論語の新硏究》, 《水滸傳》, 《古代大和朝廷》, 《中國政治論集》 등 다수가 있으며 전 저작이 12권의 《宮崎市定全集》으로 발간되었다.


옮긴이_차혜원車惠媛

 1963년 대구 출생. 연세대 사학과와 대학원 졸업. 1997년 교토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 전공은 중국 명청대의 제도, 사회사. 논문은 <崇禎年間(1627~1644), 州縣官인사와 考成法>, <18世紀, 淸朝의 지방관현지임용과 候補制> 외 다수, 번역서 미야자키 이치사다 《옹정제》(이산, 2000)등이 있다.


 - 차 례 -

옮긴이의 말 | 머리말

1. 풍류객 휘종과 기녀 이사사

2. 도적 송강과 장군 송강

3. 마법사 공손승, 활개를 치다

4. 무공을 세운 환관 동관

5. 간신 채경, 영신이길 거부하다

6. 호걸 중의 호걸 노지심과 임충

7. 대종은 공중을 날고 이규는 피바람을 일으킨다

8. 신비한 힘을 가진 장천사와 기적을 일으키는 나진인

9. 송강의 뒤를 잇는 사람들

맺음말 | 참고문헌 | 《수호전》의 판본 | 《수호전》의 줄거리 | 《수호전》의 사건과 중국사 비교 연표 |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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